흠정역본 (킹 제임스본) (AV or KJV) 에 관하여
1. 흠정역본 성경에 대한 개관
1.1. KJV의 형성 과정
KJV가 형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영국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말엽에 "영어로 되어있는 성경들의 다양성을 줄여서 원문으로부터 번역된 단 하나의 영역본을 만들기 위한 조례"라는 명칭의 새로운 성경역본을 만들기 위한 의회의 조례안이 나왔는데, 이것은 제임스Ⅰ세 때에 와서야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1603년 영국의 왕조가 튜더왕조에서 스튜어트 왕조로 바뀌면서 37세로 왕위를 이은 제임스Ⅰ세는 즉위하자마자 1604년 1월에 햄프튼 왕궁회의를 소집했다. 교회의 개혁을 목적으로 한 이 회의에서 감독들, 성직자들, 교수들, 청교도 목사들은 청교도들의 불평사항을 심의했다. 이 회의 중에 코퍼스 크리스티 대학(Corpus Christ College)의 학장이며 청교도였던 존 레이놀즈(John Reynolds)가 새로운 성경번역의 필요성을 제임스 왕에게 제안했고, 왕은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가장 학식 있는 학자들이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도록 허락했다. 이 회의에서 승인되고 1604년 2월 10일에 공포된 결의안은 다음과 같다. "원어인 히브리어와 희랍어에 철저히 일치하는 전체 성경의 번역을 시행한다. 이 성경은 난외주 없이 제작 출판되어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예배 시에 사용될 것이다."
1604년 6월 30일 제임스 왕은 성경 번역을 위해서 직접 54명의 번역 위원을 임명했는데, 이들은 성경과 언어에 있어서 탁월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실제 번역에 참여한 사람은 47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이 모인 장소와 학자들과 작업의 범위는 각각 다음과 같다.
그 룹 |
번 역 위 원 |
번역범위) | ||
웨스트민스터 ( 17명 |
Lancelot Andrews |
Robert Tighe |
10명 |
창세기 ~ 열왕기하 |
William Barlow |
William Dakins |
7명 |
로마서 ~ 유다서) | |
케임브리지 ( 15명 |
Edward Lively |
Roger Andrews |
8명 |
역대상 ~ 아가서 |
John Duport |
Andrew Downes |
7명 |
외경) | |
옥스퍼드 ( 19명 |
John Harding |
Miles Smith |
8명 |
이사야 ~ 말라기 |
Thomas Ravis |
Ralph Ravens |
11명 |
사복음서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
이밖에 참여한 그룹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 William Eyre, James Montague, Nicolas Love, Thomas Sparke등이 있다. 그리고 이중에서 옥스퍼드 그룹의 이사야-말라기 그룹 중 1명과 복음서·사도행전·요한계시록 그룹 중 3명이 실제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번역위원들은 6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는데,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와 옥스퍼드(Oxford)와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에 각각 두 그룹씩으로 구성되었다. 각각의 위원들은 먼저 자신에게 할당된 번역작업을 수행한 후에 각 그룹들이 위원 서로간의 작업을 비교하기 위해서 함께 모였고, 초고를 비교하는 동안 각 절들이 큰 소리로 읽혀졌다. 각 그룹이 각 장들의 비교를 끝낸 후에는 나머지 다섯 그룹들에게 보내져서 독자적인 평가를 받도록 했다. 성경의 모든 부분이 번역되었을 때 각 그룹에서 두 명씩이 선발되었고 이들 12명이 재검토를 담당했다. 이들은 1609년에 9개월간 런던의 서적 출판업 조합 사무소(Stationer's Hall)에 매일 모여서 난해구절이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구절들에 대해서 재검토했다. 최종적으로 모든 작업들이 마일즈 스미드(Miles Smith)와 토마스 빌슨(Thomas Bilson)에 의해서 하나로 모아져서 다듬어졌고, 출판을 위해서 왕실 출판사(The Royal Printer)에 보내졌다. 이러한 방법으로 성경을 번역함에 있어서 각 절들은 최소한 14회에 걸쳐서 철저히 검토되었다.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THE TRANSLATORS TO THE READERS)이라는 제목의 광범위한 정보가 담긴 서문은 마일즈 스미드(Miles Smith)가 작성했고, '제임스Ⅰ세에게 바치는 헌정서'는 런던의 주교인 밴크롭트(Richard Bancroft)가 작성했다. 시종일관 모든 작업은 밴크롭트가 감독했다.
출판은 옥스퍼드에서 로버트 바커(Robert Barker)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으며, 제임스Ⅰ세에게 바치는 헌정사와 함께 긴 제목으로 1611년 한 해에 두 판이 인쇄되었으나 당시 인쇄술의 사정과 인쇄공들의 실수에 의해서 이 두 판들 사이에서도 400개 정도의 차이가 나게 되었다. 후에 이러한 열악한 인쇄기술로 말미암은 명백한 '인쇄상의 실수들'을 포함해서 철자법의 표준화에 따른 '철자상의 변화들', 그리고 실수임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수 년 내에 거의 교정될 수 있었던 '본분상의 변화들'로 말미암아 KJV가 4차례에 걸쳐 개정(Revisions)되었다는 잘못된 주장이 나오게 되기도 했다.
이러한 '4차례에 걸친 개정'이라는 것은 1629년판, 1638년판, 1762년판, 1769년판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1629년판은 초기 판들의 인쇄상의 실수들이 사무엘 와드(Samuel Ward)와 존 보이스(John Bois)에 의해 행해진 교정(correction)인데, 이들은 KJV의 원래 번역자들로서 케임브리지 그룹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종류의 교정이 케임브리지에서 1638년에도 행해졌고, 이 과정을 통해서 1611년 KJV가 인쇄된 지 27년만에 대략 400군데의 본문교정 중 72%가 완료되었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 철자법이 확립되면서 이에 맞추어 1762년에 케임브리지에서, 그리고 1769년에 옥스퍼드에서 각각 출판된 것이 종종 개정이라 불리나 사실 이것은 개정(Revision)이 아니라 교정(Correction)인 것이다.
1611년부터 3년 후인 1614년까지 17판이, 33년 후인 1644년까지 182판이, 189년 후인 1800년까지 1,000판이 인쇄되었는데, 첫 번째 판에는 족보들과 지도들, 표제요약(headline summaries), 번호가 붙은 절 구분, 상호참조구절들(cross references), 간단한 난외주 및 단락구분표시 등이 포함되었다. 인쇄상의 오류들로 인해 독특한 별명이 붙여진 판들로는 1631년판(Wicked Bible), 1653년판(Unrighteous Bible), 1717년판(Vinegar Bible) 등이 있다. 한편 KJV는 1611년 출판 당시 왕실판권(Crown Copyright)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현대 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판권이 없다.
1.2. KJV 번역에 사용된 신구약 사본들
구약의 번역에 사용된 히브리어 본문은 맛소라로, 1488, 1491, 1494, 1525년에 인쇄된 판들이었다. 이밖에도 틴데일의 구약번역본(Tyndale's Old Testament translations), 매튜성경(The Matthew's Bible), 제네바성경(The Geneva Bible), 비숍성경(The Bishop's Bible), 콤플루텐시안 대조성경(The Complutensian Polyglot), 앤트워프 대조성경(The Antwerp-Polyglot), 타르굼(The Targums), 구 라틴성경(Old Latin/Itala Bible), 페쉬타(The Peshitta) 등이 참조되었다.
신약성경의 번역을 위해서는 수용원문(TR)과 함께 틴데일의 신약성경(Tyndale's New Testament), 매튜성경(The Matthew's Bible), 제네바 성경(Geneva Bible), 비숍성경(The Bishop's Bible), 프랑스의 올리베탄성경(The Olivetan Bible), 이탈리아의 다이오더티성경(The Diodati Bible), 독일의 루터성경(Luther's Bible), 구 이탈리아의 왈덴시안성경(The Waldensian Bible), 시리아의 페쉬타(The Peshitta), 레임스-듀웨이 신약성경(The Rheims-Douay New Testament), 스페인어 번역본들, 트레멜리우스의 라틴어판(Tremellius' Latin Version), 베자의 라틴판성경(Beza's Latin Version) 등이 주의 깊게 참조되었다.
1.3. KJV의 특징
KJV의 번역자들은 성경 독자들의 편의를 고려해서 가능한 한 당시에 널리 사용되던 영어 성경의 어법이나 문체를 보존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KJV에는 틴데일성경의 언어가 80 -90% 정도 보존되었으며, 나머지 4%정도는 위클리프성경, 3%정도는 레임스-듀웨이 신약성경을 비롯해서 당시 존재하던 다른 번역본들의 문체가 보존되었다. 또한 KJV는 영어가 언어로서 최전성기일 때 번역되었다. 케년(F. G. Kenyon)은 "권위역 성경의 영어는 영어 산문이 가장 품위 있고 장중하던 시기에 산문 문학의 가장 훌륭한 견본"이라고 평한다. 그 당시에는 복합어인 영어가 완전히 무르익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어나 동양어 그리고 랍비들의 교훈에 관한 연구가 그 시대 이전이나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크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청년기 상태에 있던 영어가 순수함에 있어서 최고조에 달해 있었던 시대에 번역되었다. KJV의 또다른 특징은 KJV 번역자들이 원래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영어번역에서 읽기에 수월하도록 보충된 단어들에 대해서는 이탤릭체로 표기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 이유는 KJV 번역자들이 성경을 단어 하나까지도 영감된 책으로 믿었기 때문에 신성한 하나님의 말씀에 다른 것을 덧붙이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며, 이탤릭체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행해졌는지를 교묘히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알리기 원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이전의 대부분의 역본들이 한 사람의 작업에 의한 것이었던 것에 비해서 KJV는 학자들의 협의를 거치는 방법을 충분히 활용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역본이었다.
1.4. KJV에 대한 반응 및 평가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은 영국 역사상 "종교적으로 가장 순수했던 막간극, 즉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기간"에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그것은 영국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내던져 버린 후, 그리고 영국 국교회의 배교가 이루어지기 전의 짧은 기간동안에 출판되었다. KJV는 출판 이후 빠른 속도로 비숍성경을 대치해갔다. 그러나 거의 50년간 널리 사용되던 제네바성경은 한동안은 KJV와 함께 사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킹제임스 성경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제네바성경의 마지막판이 1644년에 인쇄되었다.
KJV에 대해서 18세기의 로마 카톨릭 사제였던 알렉산더 지리스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제임스Ⅰ세의 역본에 대해서는 국내외를 망라하고 최대의 찬사가 쏟아졌다. 훌륭한 역본의 자격이 정확성, 충실성 및 원문의 철자에 대한 철저한 주의 등이라고 한다면 이 공인역본이야말로 최고의 성경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모든 문장, 모든 작업, 모든 음절, 모든 철자 및 구두점까지도 정확하게 측정하여 완성된 것으로 보이며 본문이나 난외주 역시 정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KJV에 대한 가장 예리한 비평가 중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어디 교수는 "흠정역본(KJV)은 빈번한 직역주의나 반복적인 설명이 없이도 감독 ( Bishop's Bible)성경의 장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또한 제네바 성경의 우아한 생동감, 대성경의 은은하고도 장엄한 멋, 틴데일의 명확성, 커버데일의 조화, 레임스성경의 위엄있는 신학적 어휘 등을 모두 겸비하고 있다"고 평한다.
맥클루어(McClure)는 KJV의 보급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 기원과 역사가 너무도 강력하게 그것을 추천해 주고 있기에 그것은 영국 국민들의 보편적인 승인과 함께 표준역으로서 빠르게 널리 사용되었으며, 그 권위를 세우기 위해 어떠한 왕실의 선전이나 의회의 영향력도 필요치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점에 관해서 럭크맨(Peter S. Ruckman)은 KJV가 그것의 보급 과정에서 아무런 왕실의 후원이나 장려, 혹은 의회의 숨은 영향력 등도 받지 않았으며, 대학출판부는 권위역성경과 함께 어떤 다른 번역본(Version)도 출판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었다고 설명한다. KJV는 출판된 이후 전세계의 크리스천들 간에 그 권위가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에 "권위를 부여받은 성경" 혹은 "권위역 성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KJV에 "권위가 인정된"(Authorized)이라는 칭호가 부여된 것은 의회나 대주교구회의 혹은 왕으로부터도 그렇게 부르도록 법령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었다. 제임스Ⅰ세는 성경 번역을 승인했지만 결코 어떠한 왕실의 "공인"(Authorization)도 내리지 않았다. 번역자들은 번역작업에 필요한 모임장소와 기구는 허락 받았지만 아무런 급료도 받지 않았다. 단지 서적출판업조합 사무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인쇄업자로부터 그들의 노동의 대가로 주당 30실링을 받았을 뿐이다.
KJV가 출판되자 이에 대한 혹독한 비평 중의 하나는 휴 브루톤(Dr. Hugh Broughton) 박사에 의해서 즉각적으로 행해졌다. 청교도였던 그는 뛰어난 히브리어 학자이자 성경교사였는데, 그의 과격한 기질로 인해 KJV 성경번역위원의 명단에서 제외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KJV가 출판되었을 때, 그렇게도 '졸렬한' 영어성경이 교회에서 사용되도록 촉구하는 일에 동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자신이 사나운 말들에 묶여서 갈기갈기 찢기우는 편이 더 낫다'는 편지를 왕에게 보냈다. 또다른 반대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왔는데, KJV가 반카톨릭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알미니안적인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KJV가 칼빈주의적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했다. KJV에 대한 또다른 비평 중의 하나는 그것이 구두점, 특히 콤마를 과다하게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이 성경이 공적인 낭독을 위해서 만들어졌던 목적을 고려한다면 이에 대한 배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청교도들은 KJV에 사용된 "교회", "감독", "안수" 등과 같은 단어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이러한 단어들이 감독교회의 정치체제를 옹호하도록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몇 가지 부정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KJV의 등장이 영어권 국가들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문학적인 성과를 겨냥한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KJV의 탁월함은 영문학을 위한 표준을 마련했다. 그것은 또한 18세기와 19세기의 거대한 영적 부흥의 물결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는 세계적인 선교를 통한 영혼 구령의 열매로 나타났다.
2. 번역위원회의 번역원칙 및 신학적 입장
KJV 번역자들은 서문을 통해서 자신들의 작업이 "우리 앞의 사람들이 다져놓은 기초 위에 구조물을 세우고 그들이 수고해 놓은 것들의 도움을 받아 그들이 남긴 훌륭한 것들을 더욱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훌륭한 것이 더욱 훌륭한 것으로, 또는 많은 좋은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는 역자들의 표현을 볼 때 그들이 틴데일 역본을 비롯한 이전 역본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이들이 번역시에 따랐던 15개의 원칙이 있는데, 이것은 캔더베리 대주교인 리차드 밴크롭트(Richard Bancroft)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었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기본적인 본문은 비숍성경(the Bishop's Bible)으로 하며, 원어의 진리가 허락하는 만큼만의 최소한의 변경만을 가할 것.
2. 다른 각 성경의 저자들을 포함해서 선지자들의 이름은 가능한 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이름대로 계속 유지하도록 할 것.
3. 옛 교회의 용어들, 즉 "교회"(church)와 같은 단어들을 그대로 유지할 것. - 즉 이것을 "회중"(Congregation)과 같은 단어로 번역하지 말 것.
4.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은 대부분의 고대교부들이 사용하던 의미대로 사용하되, 믿음의 유사성에 일치하고 문맥에 적합하도록 사용할 것. (덧붙여서, 똑같은 히브리어나 그리스 단어를 번역하는데 있어서 형식에 지나치게 구애되거나 과장된 문학적 표현이나 가지각색의 영어단어들이 사용되는 것을 피할 것.
5. 장의 구분은 비숍성경에 따를 것.
6. 난외주는 그것이 없으면 본문에서 너무 짧고 적절하게 표현될 수 없다고 판단되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의 보충설명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첨가하지 말 것.
7. 상호 참조(Cross-references)는 성경의 다른 곳의 연관된 절들과만 관련시킬 것.
8. 모든 번역이나 개정은 우선 개인적으로 작업한 후에, 위원들 모두의 정밀한 조사와 비평을 거쳐 최종적인 동의가 이루어진 후에 행해지도록 할 것.
9. 성경의 어느 부분의 번역이 완료되면 그것은 다른 모든 그룹들에게 보내져서 "진지하고 사려 깊게" 검토되도록 할 것. 폐하께서 이 점을 매우 유의하고 계심.
10. 만일 한 그룹에서 성경본문을 검토하던 중에 어떤 부분에서든지 의심이 가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반드시 원래 그것을 작업했던 그룹에게 알리도록 할 것. 그들의 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각 책이 번역완료된 때마다 모이면서 각 그룹 대표로 구성되는 총회(General Meeting)에서 그 문제가 결정되도록 할 것.
11. 번역을 맡은 자들이 특별히 난해한 부분이 있을 때는 영국의 어떤 학자로부터 든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될 것임.
12. 각 주교들은 자기 교구에 있는 "언어에 재능이 있는" 성직자들로부터 이 번역에 대해서 비평적인 의견을 듣도록 할 것.
13. 각 그룹의 책임자들은 웨스트민스터와 체스터의 주임사제(Dean) 및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 있는 국왕의 히브리어 혹은 헬라어 교수가 될 것.
14. 틴데일성경, 커버데일 성경, 매튜성경, 대성경, 제네바성경 등은 비숍성경보다 본문에 더 잘 일치할 때에 사용될 것임.
15. 양 대학들부터 번역에 참가하지 않은 서너 명의 원로목사들로 하여금 이 일의 검토자가 되게 할 것.
이와 같은 원칙 하에 번역자들이 매우 엄격하고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번역에 임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그들의 서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는 칼대아어, 히브리어, 수리아어, 헬라어, 라틴어 뿐 아니라 스케인어, 불어, 이태리어, 화란어에 대해서도 번역가나 주석가들에게 문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이미 해놓은 것을 수정하거나 우리가 이미 망치질해 놓은 못을 다시 빼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오히려 필요한 모든 도움을 활용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작업이 더딘 것에 대한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 신속하게 끝마쳤다는 칭찬을 탐내지도 않았습니다."
KJV 번역자들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이들 모두 반카톨릭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가 아닌 것을 잘 알았으며, 교황이 적그리스도 중 하나임을 깨달았던 사람들이었다. 이와같은 그들의 태도는 국왕에게 쓴 헌사에서 교황의 추종자들이 사람들을 무지와 어두움 가운데 가두어 놓으려 한다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다.
3. 번역자들
NASV나 NIV 등의 번역위원회가 익명으로 되어있는 것에 반해 KJV의 번역위원들은 대부분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KJV 번역자들은 정치적인 면과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 매우 다양한 입장에 있었으나,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 있다고 믿었으며, 성경이 영감되고 오류가 없으며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었다.
번역자들을 그들의 학문적인 능력에 있어서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 스테파누스, 베자의 희랍어 성경들을 포함해서 콤풀로텐시안 폴리그롯(Complutensian Polyglot, 1522), 앤트워프 폴리그롯(The Antwerp Polyglot), 트레멜리우스(Tremellius's Latin Version), 베자(Codex Beza [D] ) 등의 라틴어 번역본들을 쉽게 참조할 수 있었고, 여러 번역자들과 주석가들, 칼데아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희랍어, 라틴어, 스페인어, 불어, 이탈리아어, 화란어 등을 참조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KJV 번역자들의 신앙과 학문적 능력에 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데, 이들 중 몇 명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 존 레이놀즈 (John Reynolds, 1549-1607)
존 레이놀즈는 영국 교회들 내의 청교도들을 이끄는 대표자였으며, 제임스Ⅰ세가 소집한 햄프톤 궁정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에서 당시 사용되던 성경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새로운 역본의 필요성을 제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레이놀즈는 카톨릭 가정에서 자랐으나 1573년경에 카톨릭으로부터 청교도로 개종했다. 그는 13세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으며, 23세에 그곳에서 그리스어 강사가 되었고, 퀸즈 대학(Queens College)의 학장을 지냈다. 그는 엄숙하고 거룩한 생활로 유명했으며, 매우 성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놀랄만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는데, 심지어 "살아있는 도서관"이라고 불렸다.
그는 또한 언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엄청난 양의 저술을 했는데,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의 책들과 교회의 모든 고대 기록들을 읽었다. 그는 1578년 경 로마 카톨릭의 광신자인 존 하트(John Hart)와,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골리앗으로 여겨졌던 벨라민(Bellarmine) 추기경 등과 논쟁을 통해 로마 카톨릭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공박하기도 했다. 그는 KJV 번역을 마치기 전에 죽었는데, 그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조언과 비평을 위해서 자신들의 어려운 작업들을 가져오곤 했다.
3.2. 란스롯 앤드류스 (Lancelot Andrews, 1565-1626)
KJV 번역자들 중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앤드류스 박사는 어릴 때부터 공부에 심취했던 것으로 유명하며, 후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동양언어와 신학을 공부했다. 어학에 매우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그는 일년 중 부활절 등의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방법으로 유럽의 현대 언어 대부분을 익혔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의 학장이었으며, 알톤(Alton)의 교구사제였고, 치체스터(Chichester)와 일리(Ely)와 윈체스터(Winchester)의 주교였다. 31세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채플린(Chaplain)이 되었던 그는 제임스Ⅰ세의 추밀 고문관이기도 했다. 번역가로서의 그의 자질을 보면, 그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히브리어, 칼데아어, 시리아어, 아라비아어 등에 탁월했고, 무려 15개의 현대 언어들에 정통했다. 맥클루어(McClure)는 그의 저서 「부활된 번역가들」(Translators Revived)에서 앤드류스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특히 동양언어에 있어서, 만약 그가 바벨탑 시대의 언어혼란에 직면했었다면 번역담당 총사령관(Interpreter -General)이 되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매우 근엄했기 때문에 종종 경솔하게 행동했던 제임스 왕도 그에게 받은 깊은 인상 때문에 그의 앞에서는 그러한 경솔한 행동을 삼가했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으로서 매일 5시간씩 기도했으며 매우 기품이 있었고, 친절하며 공손했다. 그는 또한 뛰어난 설교자로서 "설교자들의 별"(the Star Of Preachers)이라고 불렸으며, 반카톨릭적 입장을 분명히 했고, 왕권신수(the divine of kings)를 옹호했다. 그는 KJV번역 위원회에서 웨스트민스터 그룹의 의장이었으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3.3. 마일즈 스미드 (Miles Smith, - 1624)
킹제임스 성경의 서문(the Translator's Preface)을 담당했던 스미드(Miles Smith)는 칼데아어, 시리아어, 아라비아어의 전문가였으며, 그리스와 라틴 교부들에 정통해서 그들 모두에 대한 주석을 썼을 뿐 아니라 히브리어와 에디오피아어에 능통했다. 그는 옥스퍼드의 구약 담당 그룹에 속해 있었으며, 12명의 재검토를 위한 위원회에 참여했고, 출판 직전의 최종 편집작업에 빌슨(Thomas Bilson) 주교와 함께 참여했다. 그는 확고한 칼빈주의자였으나 전적으로 청교도는 아니었다.
3.4. 리챠드 킬비 (Richard Kilby, - 1620)
그리스인으로 히브리어 비평에 뛰어났던 그는 옥스퍼드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언젠가 그는 한 설교자가 킹제임스 성경에서 어떤 단어가 부적절하게 번역되었음을 3가지 이유를 들어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나중에 그는 그 설교자에게 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심사숙고해서 해놓은 번역이 옳은지에 대해서 13가지의 다른 이유들을 들어 설명해 주었다.
3.5. 그 외
이밖에도 잘 알려진 인물로는 존 오브롤 (John Overall, 1559-1619)이 있는데, 오브롤 박사는 초대교회 교부들의 인용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기 때문에 요한일서 5장 7절 같은 구절의 신빙성을 입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그 필사본적인 증거가 알렉산드리아 철학자들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부들간에 상당한 증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암 베드웰 (William Bedwell)은 "특출한 동양어 학자"였다. 그의 비문에는 "그가 동양어에 관한 한, 그 시대에 살았던 어는 누구보다도 박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1612년에 앤트워프에 있는 라펠렌기우스 출판사에서 아라비아어로 된 사도요한의 서신들을 라틴어로 출판했으며, 많은 아라비아어 필사본들과 수많은 주석, 그리고 그것들을 인쇄하는 폰트(font)들을 케임브리지 대학에 남겼다. 그는 페르시아어 사전을 편집했다. 로렌스 쉐더통 (Lawrence Chaderton, 1537-1640)은 스스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등을 공부했고,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으며 프랑스어와 스페인어 및 이탈리아어에 뛰어났다. 그는 또한 폭넓은 성경 이해를 위해 수많은 랍비들의 글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청교도였으며 햄프톤 궁정회의(The Hampton court Conference)에 참석했던 네 명중의 한 명이었던 그는 또한 능력 있는 설교자였다. 존 보이스(John bois)는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의 대가였는데, 아버지의 무릎에서 공부한 그는 5살 때 히브리어 성경을 읽을 수 있었던 천재였다. 그 뿐 아니라 6살 때에는 히브리어를 분명하고도 기품있게 쓸 수 있었다. 핸리 새빌 (Henry Saville)은 그리스어와 수학적 지식으로 유명했고, 성경에 대한 지식과 언어에 능통한 교육가였으며, 헨리 8세 통치 가간 중 엘리자베스 여왕의 그리스어와 수학선생이 되었다. 맥클루어 박사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 교부들 중 가장 유명한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전집을 처음으로 편찬했다. 또 다른 번역위원인 존 래이필드(John Laifield)는 건축에 뛰어난 능력이 있었으며, 장막(tabernacle)과 성전(temple)의 구조에 관한 한 그 견해가 상당히 신뢰되었다. 프란시스 딜링햄 (Francis Dillingham)은 그리스어로 토론할 수 있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논쟁과 다른 관점들을 다룬 다양한 논문들을 출판했다. 청교도였던 토마스 해리슨 (Thomas Harrison)은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뛰어났다. 그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Trinity College)의 부학장으로 일했으며, 그 대학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칠 교수들을 선발하는 시험관 중 한 사람이었다.
4. 번역상의 문제점 및 번역에 관련된 논쟁
KJV 번역에 있어서 특히 요한일서 5장 7절과 관계된 논쟁이 주목할 만하다. 이 논쟁은 본 구절에 관한 사본학적 증거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야기된 것인데, 학자들 사이에서는 '사도요한의 쉼표'(Johannine Comma) 논쟁으로 알려져 있다. 에드워드 힐즈(Dr. Edward Hills)는 이 구절의 사본학적 증거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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