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투스 레셉투스를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하며, 절대 다수 사본의 지지를
받으니 권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많은 사본을 필요로
하는 지방에서, 자유분방한 교회 지도자들이 많은 사견(私見)을 사본에 넣으며 필사했을
경우, 그 지방에는 원본과는 크게 상거가 있는 확대된 본문이 대거 유포될 수 있다. 이런
경로를 거쳐서 확대된 본문을 가진 사본들이 오늘날 많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박창환)"
(위 의견에 대한 반론)
개인적인 의견도 포함되었지만 다른분들이 쓰신 객관적인 자료를 많이 포함시켰으니 충분히 판단가능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3번과 4번은 TR찬성자와 반대자의 입장을 나란히 실었으니 꼭 보시길.
반론 순서
1. 비잔틴 계열 전통원문
2. 사본의 정확도 문제
3. 사본의 작성 시기
3-1. TR반대자의 의견
3-2. TR찬성자의 의견
4. 타 사본의 지지여부
4-1. TR반대자의 의견
4-2. TR찬성자의 의견
비잔틴 계열 전통원문
우선 반론에 앞서서 다수본문이라고 하는 비잔틴 계열의 전통원문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리아의 페쉬타(Syrian Peshitta, 3-5 세기), 이집트의 고딕(Gothic, 4 세기), 코덱스 프리아누스(Codex Freeianus, W문서) 및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복음서 부분 등이 이 계열 사본에 속한다. 이 계열의 사본을 “다수본문”(Majority Text)이라고 하는 것은 이 계열에 속한 헬라어 사본이 수적으로 많기 때문이며, “전통원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사본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것만이 신약성경의 전통을 이어온 사본이라고 주장한 데서 비롯된다. 인쇄본 시대에 이르러 베자와 에라스무스가 이 계열의 초창기 사본으로 신약성경을 편찬하여 출판하고 권서(勸書)하는 과정에서 소위 “텍스투스 리셉투스,” 즉 “수용본문”이라는 어휘가 생기기도 했다. 이 비잔틴 계열 사본에서 루터의 독일어성경(1522-34)과 영국의 킹제임스 성경(1611)이 번역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경이 손에서 손으로 필사되어 전달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대문자로 기록되다가 9, 10 세기경부터는 소문자와 초서체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신속하게 쓰기 위한 목적과 경제적인 이유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한호-신약성경 사본(寫本)의 정통성(正統性)에 관한 문제 中
사본의 정확도 문제
고문서에 있어서 사본의 숫자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우선 객관적인 고문서검증법인 고서검증법에 의하면 사본의 수는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본간의 차이가 많고 적음에 따라 어떤 것이 원본에 가까운 사본인지 평가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책중에서는 제일 정확한 책인 것은 알겠는데, 0.5%는 왜 오차가 있느냐 하는 것을 문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오차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0.5% 중에서 80%에 해당되는 0.4%는 철자의 잘못으로 밝혀졌습니다. 즉 "모든 교회에게 문안하노라" 하는 내용이 "모든 고회에게 문안하노라" 하는 식이지요. 이것은 누가 봐도 '교회'를 '고회'로 잘못 썼구나 하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고,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나머지 20%는 접속사의 오류로 밝혀 졌습니다. 즉 'A 그리고 B 그리고 C'라는 내용이 'A 콤마(,) B 콤마(,) C'하는 식으로 접속사가 생략된 것입니다. 이것역시 누가 봐도 문장을 잘못 이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비록 오류 자체는 0.5%이지만 사실은 오류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판정되었습니다. - 서민호 교수의 창조과학 中
사본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문서였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사를 할때 생각없이 아무것이나 필사하지 않는다는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성경은 다른책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기때문에 전통적으로 필사자는 이 점을 주의했다고 알려져있고, 어떤 사본을 필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오늘날 우리가 수많은 사본을 놓고 고심하듯, 우리의 선배들도 고심했을 것입니다. 부정확한 성경을 갖고 싶은 사람은 안티기독인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안티기독인은 초대교회시절부터 있었고, 따라서 이들이 만든 사본들도 많지는 않지만 오래 전 부터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건전한 필사자들은 안티기독인들을 알았고 그들을 경계했으므로 그러한 사본은 필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즉, 숫적으로 큰 차이가 나게 되는 것은 뻔한것입니다. 또한 소수사본들간의 차이가 많은 점은 훼손이 심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훼손이 심하면 정상적인 사본일수 없습니다. 오히려 안티기독인이 만든사본이 아닌가 의심해야 할 것입니다.
제인 핫지(Zane Hodges)는 “다른 고전의 필사본 관례만 보더라도 최초의 원본에 가장 가까운 원문만이 가장 많이 남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증거로 80%이상이라는 수치가 가장 강력한 가정의 뒷받침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킹 제임스 역본이 번역된 다수 필사본이 원문을 옳게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현실적이다.”라고 말했다.
윌버 피커링(Wilbur Pickering)은 “90%이상이 지배한다는 것은 그 원문이 원본에 돌아가지 않고는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라고 했고, 또 본 소돈(Von Sodon)도 “만일 비잔틴, 알렉산드리아, 웨스턴 등 세 사본이 동등하다해도 비잔틴 원문이 80~90% 우위를 차지한다.”라고 말한다.
성경은 가장많이 번역된 책일뿐만 아니라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가장많이 필사되었습니다. 또한 초기의 필사는 개인적인 소장을 목적으로 필사되었습니다. 따라서 텍스투스리셉투스(이하 TR) 의 경우 사소한 오류가 많이 발견될수 있지만 의미상으로 동일하기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수사본의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내용을 변경시켰으므로 실수로 보기힘든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이런경우에는 사본간의 차이가 많이 존재하면 할수록 정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잘못된 사본이 많이 존재한다고 하면 성경의 권위가 많이 떨어지지요.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을 적대시하는 세력들에게 좋은 먹잇감입니다.
완전한 성경이 보존되었다는 교리를 대적하려는 그들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몸소 대답하실(행1:8) 만큼이나 성경에 의해 보증을 받고 있습니다. 시편 12편 7절은 명백하게 말합니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따라서 우리는 친히 영감을 주셨던 완전한 말씀들을 그대로 완전히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자께는 실로 그것이 별로 큰 어려운 일이 못됩니다.
이런 논제에 겁을 먹은 근본주의자들은 시12:7에서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두 가지 공격을 가합니다.
1. 그들은 7절의 ‘그것들’(them)은 말씀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후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시12:7에서 그 단어를 그렇게 번역한 역본들을 부리나케 출간합니다. 신국제역(NIV)에서 이 구절을 봅시다.
오 주여, 주께서 우리를 안전히 지키사 그런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보호하시리이다.
O LORD, you will keep us safe and protect us from such people forever.
이것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부정직한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지킨다’로 번역된 ‘to keep’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shamar’인데 신국제역(NIV) 번역자들은 2인칭 단수 미래로 나타나 있는 “thou shalt keep them”을 “you will keep us”로 번역했으며 3인칭 복수인 ‘them’을 1인칭 복수 ‘us’로 번역해 버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오역의 본보기 그 자체입니다.
...(중략)...
뿐만 아니라 시12:7의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자주 발견되는 약속 즉 유대인들의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말씀들을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직접적인 언급은 시12:6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 사무엘 깁
만일 성경을 사랑하는 개인들로 부터 시작된 필사가 없어서 이 보다도 못한 안티기독인에 의해 무참히 훼손된 사본들만 남아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 되지 못하면 어쩔뻔 했습니까? TR반대자들은 이렇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지금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오류가 많다고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TR반대자들은 어떻게 그런 인간적인 생각을 하시는 것인지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는 오늘날에는 우리의 머리와 과학으로 이해안되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판단해도 되는것일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그 말씀을 통해 진리를 알수 있도록 원하시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TR반대자들이 옹호하는 대표적인 사본들에 필사자들의 머리로 이해안된다고 삭제한 구절들이 들어있는 점이 우연의 일치는 아닌가 봅니다. 혹시 그래서 좋아하시는것일까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는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일이 있습니다. 후자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것은 인간이 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록자를 통해 기록하신 것이며 보존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만 하고 보존하지 않으시면 수많은 공격의 위험에 노출되었던 성경이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달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존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성경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잘났어도, 할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시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거나 성경을 없애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시도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시므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종이와 잉크가 발달되지 못해서 성경의 각 책들은 대부분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에 기록되어서 교회에 회람되었을 것이다. 이 문서는 파손되기 쉬운 것이었으므로, 신자들은 그것이 낡아지기 전에 개인적인 소장을 목적으로 다른 종이에 손으로 베껴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단순히 개인적으로 소장한다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영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을 것이며, 바로 이러한 동기와 노력이 오늘날 많은 사본을 남기게 하였을 것이다. 1450년 쿠덴베르그(Johannes Gutenberg)가 인쇄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보존되었다.
...(중략)...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약성경의 초기 사본들은 대부분 성경을 기록해서 사본을 만들어 후세에 남긴다는 생각보다는 사도들이 쓴 예수의 가르침을 항상 가까이 두고 읽기 위해 개인적으로 기록한 것이었으므로 정확도에는 훈련된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기록한 맛소라 성경(구약)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조한호-신약성경 사본(寫本)의 정통성(正統性)에 관한 문제 中
"교회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많은 사본을 필요로 하는 지방에서,자유분방한 교회 지도자들이 많은 사견(私見)을 사본에 넣으며 필사했을 경우, 그 지방에는 원본과는 크게 상거가 있는 확대된 본문이 대거 유포될 수 있다."
이것이 TR(텍스투스 리셉투스)에만 해당되는가?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지나친 억측이라고 생각하고 이런식의 비판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계열 사본에도 마찬가지 해당되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히려 TR반대자들이 지지하는 알렉산드리아는 과거로부터 전통적으로 타락한 지역이라는 인식이 있다는 것도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게다가 교회가 어느 한 지역에서만 성장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지역에는 어김없이 예외없이 성경이 필요했고 번역이라든지 필사는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필사가 어디에서 이루어졌겠습니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는게 상식이고 사본들의 분포도 이를 증명하지 않습니까?
또한 이것이 사견을 넣은것인지 원문의 내용인지 어떻게 판단합니까?
만일 다수사본이 고의적으로 변개해서 퍼트린 결과라고 한다면 이런일을 주도할만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조직은 제가볼땐 카톨릭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카톨릭은 소수사본을 지지하므로 카톨릭은 아닌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누구일까요? 사견이 많이들어갔으면 내용에 변형이 많이 가해졌다는 말이 되는데 다수사본은 소수사본보다 사본간의 차이가 적습니다. 이런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글을 쓰시면 안되지 않을까요?
사본의 작성 시기
TR반대자의 TR찬성자의 입장을 나란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TR반대자
결론: 사본의 정통성(正統性)의 기준
1. 시기적으로 사도시대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이런 사본의 특징은 파피루스에 쓰였거나, 대문자, 즉 언셜 코덱스형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형태의 사본은, 비잔틴 계열의 전통원문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א, B, A 등의 사본으로서 4세기부터 늦게는 8-9세기까지 쓰여졌다. 비잔틴 계열의 사본은 소문자 사본으로서 이것은 기록 연대가 9세기 또는 10세기 이후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비잔틴 계열의 사본에는 다른 계열의 사본들과는 달리 AD 350 년 이전의 것으로 보이는 헬라어 필사본이나 역본, 또는 교부들의 문서가 하나도 없다. 이 말은 곧 에라스무스와 베자가 편찬한 헬라어 성경의 텍스트가 9세기 이후에 쓰여진 사본이라는 의미도 된다.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은 AD 4세기 경부터 기록된 것들로서, 이 계열에 속하는 세 개의 사본은 기록의 정확성과 분량, 보존상태와 내용이 가장 온전하며, 특히 시내산 사본(א)은,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황제의 지시에 의해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1400여 년 동안 깊은 수도원에 간직되어 있다가 19세기에 발견된 것으로서 아무도 그 내용의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계열의 사본은 후에 Westcott-Hort, Nestle-Aland, UBS가 헬라어 비평 본문을 편찬할 때 주로 사용한 본문이 되었다.
이 본문에 따른 대표적 영역본으로는, 검토한 바와 같이 RV, ASV, RSV, NEVB 등이 있고; 현재 대부분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한글판은 1993년 개정 작업을 사작하면서 개정 텍스트로 위스코트-호르트와 네슬레-알란트의 연구를 잇는 헬라어 신약성경, 즉 UBS 3판을 사용했다.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1966년에 출판된 GNT 1판을 텍스트로 했고, 표준새번역은 1983년에 출판된 GNT 3판을 텍스트로 했다.
아래는 TR찬성자
학자들이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하지만, 분명히 <구라틴 역본>은 시내사본과 바티칸사본(4세기)보다 먼저 있었다. 이는 2세기와 3세기의 교부들이 <구라틴 역본>을 인용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시리아의 교회들이 모두 <구시리아 역본>을 사용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시리아의 교회들은 431년 경에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그 두 그룹들은 모두 같은 성경을 사용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변개된 성경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가장 오래된 필사본”으로서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을 제시하지만, 그 사본들이 있기 오래 전에 이미 통용되던 성경이 그 두 사본들을 반대하고 있다면 그 두 사본, 즉 학자들이 그렇게도 숭배하는 시내사본과 바티칸사본의 권위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이 두 번역본이 A.D. 2세기의 것이 아니라고 억지 주장을 펴는 것이다.
1. 시리아어 역본들
시리아는 팔레스타인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유대인이 유래한 곳이기도 한데(신 26:5),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곳에 처음 성경을 가르치고 선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인 안티옥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다(행 11:26). 또한 시리아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조상들이었기에(창 11,12,24장), 하나님의 말씀이 유대인에게 맡겨졌다는 것이(롬 3:2) 적용될 수 있다.
1) 사복음서의 구시리아 역본 : 큐레토니안 시리아 역본(Curetonian Syriac, syc syrc)과 시내 시리아 역본(Sinaitic Syriac, sys syrs)이 있다. 특별히 후자는 시리아-비잔틴 계열의 헬라어 필사본들과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무조건 “서방원문”이라 부른다.
2) 페쉬타 / 시리아 벌게이트 : 페쉬타(Peshitta)라는 말은 “곧은, 똑바른” (straight)이나 “자, 척도”(rule)라는 뜻이며, 벌게이트(Vulgate)는 “일상적으로, 또는 평범하게 수용된”의 뜻이다. 약 1700년 동안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의 정통적인 견해는 페쉬타가 2세기 초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페쉬타가 <킹제임스성경>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 입장은 학자들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3) 팔레스타인 시리아 역본(sypal) : A.D. 400-450년에 기록된 것이다. 헬라어 <표준원문>과 일치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카이사랴 계열”이라는 것을 만들었으며, 이 역본을 <표준원문>과 다른 계열(카이사랴 계열)로 분류해 버렸다.
2. 라틴어 역본들
<구라틴 역본>의 번역도 시리아의 안티옥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리스도인 선교사들의 손을 통해 유럽과 아프리카로 전해졌다. 이것이 후에는 두 개의 개정본, 즉 아프리카의 개정본과 유럽의 개정본으로 바뀌게 된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라틴어 역본에 외경이 첨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틴어 역본을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외경이 첨가된 <구라틴 역본>의 초기 필사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라틴어 역본에 외경이 첨가된 것은 후에 개정된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에서였다(A.D. 400-420). 이것은 중세 기간 중에 로마 카톨릭의 공식 성경이 된다.
현재 파리의 도서관들에만 800개 정도의 필사본들이 있고, 수천개의 <구라틴 역본>과 벌게이트의 필사본들이 개인과 도서관들에 소장되어 있으며, 여러 시기의 많은 벌게이트 판본들이 나타난다.
1) 구아프리카 라틴 역본 : 여기에는 코덱스 팔란티누스(Codex Palantinus, e), 플레리 팔림세스트(Fleury Palimpsest, h), 보비엔시스(Bobbiensis, k) 등이 있다.
2) 구유럽 라틴 역본 : 여기에는 코덱스 베르셀렌시스(Codex Vercellensis, a)와 코덱스 베로넨시스(Codex Veronensis, b), 코덱스 콜베르티누스(Codex Colbertinus, c), 코덱스 베자(Codex Bezae - Cantabrigiensis / Codex Claromntanus, d), 코덱스 기가스(Codex Gigas, gig) 등이 있다. 여기서 코덱스 베자는 헬라어와 라틴어의 대역인 베자사본에 있는 라틴어 역본을 지칭하는 것이며, 특별히 코덱스 기가스는 때때로 “마귀의 성경”(The Devil's Bible)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이 성경이 유럽에서 “반카톨릭주의”, 즉 카톨릭이 “이단”으로 부른 사람들에게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3) 라틴 벌게이트(vg, A.D.420) : 암흑시대에 카톨릭에 의해 이루어진 공식적인 개정본이다. 제롬이 만든 이 역본은 <표준원문>의 본문과 <구시리아 역본>의 본문과 <구라틴 역본>의 본문을 제거했고, 대신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의 본문으로 대체시켰다. 그 결과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의 신약은 기본적으로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의 본문이 된다.
그러나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가 나온 이후에도 <구라틴 역본>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필사되었다. <구라틴 역본>은 초기의 켈트인(Celts)과 서유럽의 프랑크족(Franks), 골 사람들(Gauls)에게 전수되었다.
터툴리안은 A.D. 200년에, 씨프리안은 A.D. 240-250년에, 이래내우스는 A.D. 120-190년에, 히폴리투스는 A.D. 180-235년에 <구라틴 역본>을 인용했는데, 이는 시내사본과 바티칸사본이 등장하기 오래 전이었다. 그래서 제롬은 권위있는 이 성경에 상충되는 카톨릭의 공식적 개정본을 제시함으로써 성경변개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라틴 역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i) <구라틴 역본>은 <킹제임스성경>과 매우 일치하며,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나 오리겐을 반대한다.
ii) <구라틴 역본>은 많은 헬라어 필사본들에 없는 본문들(예를 들면 요일 5:7-8, 행 8:3; 9:5-6)을 담고 있다.
iii) 제롬의 카톨릭 <라틴 벌게이트>는 많은 부분에서 <구라틴 역본>을 개정했다. 이는 <구라틴 역본>이 카톨릭 교회의 적들, 즉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의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왈덴시안들이 구라틴 역본을 사용했다.) <구라틴 역본>의 본문들은 프랑스의 보존된 성경 <올리베탄>과 이태리 성경 <디오다티>와 같이 <표준원문>에서 번역한 다른 번역본들과도 일치한다. 이 <구라틴 역본>이 아일랜드에서 성 패트릭(389-465)이 가지고 있던 성경이었다. 고대 영국은 카톨릭이 오염시키기 이전에 패트릭에 의해서 복음화가 되었는데, 그 초기의 브리튼(British) 그리스도인들은 <구라틴 역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니고 있었다. David Otis Fuller, Which Bible, (Grand Rapids, Mich.: Institute For Biblical Textual Studies, 1990), p.199. 이는 오리겐이 헥사플라를 만들기 전이며,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가 만들어지기도 전이었다. 드루이드교도들도 패트릭을 통해 개종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경은 물론 구라틴 역본이었다.
3. 고트어 역본(goth)
고트어 역본은 울필라스(Ulfilas, A.D. 350)가 번역한 것으로, 유럽의 언어로 번역한 첫번째 역본이다. 평가되기로는 울필라스가 “아리안주의”(Arianism)를 취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용어는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반 카톨릭”의 입장을 취하는 모든 사람에게 붙여진 용어였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항상 “아리안주의자”로 불리게 된다. Ruckman, The History of the New Testament Church, Vol. I, pp.43,182,214.
울필라스는 고트인들에게 선교하는 감독이었는데, 문자가 없이 말로만 사용된 고트어를 기록된 형태의 문자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는 고트어 알파벳을 만들었다. 울필라스는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과는 다르게 콘스탄티노플(비잔틴)에서 유래한 헬라어 필사본들, 즉 전통원문(표준원문)의 필사본을 사용했다. Ruckman, The Christian's Handbook of Manuscript Evidence, p.81. F. Kenyon, Handbook to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p.240.
고트어 성경은 A.D. 330년에 사용되고 있었고, 그 이후까지 바티칸사본과 시내사본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울필라스의 필사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변개된 성서들보다도 최소한 20년이 앞서거나, 100년은 더 오래된 것이다.
현재 울필라스의 역본 중 남아 있는 것은 “코덱스 아르겐테우스”(Codex Argenteus) - “은 코덱스”(the silver Codex) - 인데, 그것은 복음서 전체를 담고 있으며, 벨럼에 은 잉크를 사용하여 큰 글자로 기록한 것으로, 현재 스웨덴 웁살라의 대학 도서관에 있다. 고트어 역본은 이외에 바울 서신서들의 필사본과 아홉 개의 다른 필사본들에 보존되어 있다.
4. 에디오피아 역본(eth)
에디오피아 역본은 A.D.350년 경에 열 권의 외경과 일곱 권의 위경을 담은 채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에디오피아 역본의 본문은 혼합된 본문이지만, 훼손당하기 전에는 비잔틴 본문이었다는 분명한 표시가 나타난다.
5. 아르메니아어 역본(arm)
아르메니아어 역본은 때때로 “역본들 중의 여왕”이라고 불리며, 학자들에 의해서도 초기 역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정확한 것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라틴 벌게이트>를 제외하면 아르메니아 역본의 필사본들은 고대의 다른 역본들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 이 역본은 마태복음 1:25; 5:22; 6:13; 누가복음 2:14; 23:42, 요한복음 9:35 등과 다른 많은 곳에서 변개된 성서들과 달리 올바른 본문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성경 변개자들은 시리아 원문 유형의 다수 필사본들에서 아르메니아어 역본을 제거하려고 이 역본이 성격상 “카이사랴 계열”이라고 분류했다.
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선교사가 된 메슬롭(Mesrob, A.D.361- 439)은 울필라스가 고트인들을 위해 했던 것처럼 헬라어와 시리아어와 페르시아어의 글자들을 아르메니아어 글자들로 전환시켜서 아르메니아어의 알파벳을 만들었고, 그것이 아르메니아어 신약에 사용되었다.
6. 그루지아어 역본(geo)
그루지아는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구소련의 연방에 있던 공화국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선교사들이 A.D. 330년 경에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루지아어 역본의 복음서 필사본들 중에서 오래된 것은 A.D. 897년의 아디쉬(Adysh)와 A.D. 913년의 오피자(Opiza)와 A.D. 995년의 트베트(Tbet) 필사본 등이 있다. 그루지아어 역본은 분명하게 시리아-비잔틴 원문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또 다시 학자들에 의해 억지로 “카이사랴 계열”로 분류된다.
7. 그 밖의 번역본들
1) 슬라브어 역본 : A.D. 792-816년 경에 번역되었다.
2) 아라비아어 역본 : 전통에 따르면 A.D. 650년에 시리아 역본에서 번역되었다.
3) 누비아어 역본 : 12세기에 번역되었다.
4) 페르시아어 역본 : 17, 18세기에 출간되었다.
타 사본의 지지 여부
TR반대자의 TR찬성자의 입장을 나란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TR반대자
결론: 사본의 정통성(正統性)의 기준
2. 여러 다른 사본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본의 수가 많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를테면, 맛소라 사본이 1947년 사해의 쿰란에서 발견된 이사야 사본과 일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점에서 비잔틴 계열의 헬라어 사본은 “다수본문”이라고 불릴 만큼 수가 많다. 그러나 그 이유는 알렉산드리아나 로마가 4세기 이후에는 헬라어를 사용하지 않은데 반해 콘스탄티노풀은 15세기 중반까지 헬라어를 공용어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자와 에라스무스의 사본이 다른 비잔틴 계열 사본의 지지를 얼마나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TR 옹호자로 잘 알려진 버곤은 TR 개정판을 내기 위한 조사에서 마태복음에서만 TR과 “다수본문” 사이에 150개의 차이를 발견했다고 말했다.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 29.
독자는, 만약 신약성경 전체를 조사한다면 얼마나 많은 차이가 발견될 것인지 추측 할 수 있을 것이다. KJV 주의자 레이(Jasper J. Ray)는 신약에서 162 시험 구절을 선택해서 비평헬라어 성경과 영역성경을 비교한 결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 구절 TR과 다수본문에도 적용하여 비교한 결과 31개 구절의 내용이 달랐다는 통계를 내었다.Jasper J. Ray, 「하나님은 오직 한 성서를 쓰셨다」 [God Wrote Only One Bible] (Eugene, Ore: Eye Opener, 1980), 32-70, 박창환, “텍스투스 리셉투스,” 30도 참조.
현대 본문비평 분야의 권위자의 한 사람인 카슨(D. A. Carson)은, 비잔틴형 본문이 TR과 같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텍스투스 리셉투스는 겨우 몇 개의, 비교적 늦은 시대의 사본들을 기초로 한 것”이라 강조했다.D. A. Carson, The King James Version Debate: A Plea For Realism(Grand Rapids, Baker, 1979), 67-68. 박창환, “텍스투스 레셉투스,” 30-31.
조한호-신약성경 사본(寫本)의 정통성(正統性)에 관한 문제 中
아래는 TR찬성자
그 다음은 『W』 사본에서 마태 복음서의 마지막 2/3이상이 비잔틴 원문임을 증명해 준다. 특히 『W』 사본은 4세기 이전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사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다음은 이집트의 교부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네째번으로는 체스터 베티(Chester Beatty) 파피루스 사본이 증명한다. 복음서 부분에서 비잔틴 문선은 26개이며 사도행전에서 8개, 또 바울 서신에서 31개나 된다.
그 다음엔 Bodmer Ⅱ 파피루스가 증명한다. 이 페쉬타는 원래 시리아 성경으로 구약은 히브리구약과 같고 신약은 2세기 때의 것으로 분류되는 가장 오래된 신약 성경의 시리아어 번역본이다. 이 페쉬타는 비잔틴 사본과 아주 동일하다. 그 다음은 니케아 회의 이전 교부들이 증명한다. 2세기와 3세기 때도 대도시에서는 비잔틴 사본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로 시골 지방에서 부모들로부터 받은 신약사본을 원문을 변개시키지 않고 복사해 내려온 전통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니케아회의 이후의 교부들도 이를 증명한다. 처음에는 안티옥과 소아시아 캅파도키아에서 발견되었다. 2세기와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원문에 상당한 손상을 입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세기 중엽 이후에 비잔틴 사본이 희랍교회에 출현한 것은 보편화된 경향이었다
그러면 누가 최초의 원문을 소유하고 있었을까? 지역적으로 분류해 보면 소아시아 교회들에서 12본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면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즉, 요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서, 요한 1,2,3서, 요한계시록 등이다.
그리스에서 6본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후서이다. 그 다음에는 크레테에서 가진 한 권으로 디도서였다. 그 다음에는 로마에 두 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마가복음과 로마서이다. 그 나머지, 누가복음, 사도행전, 베드로후서는 소아시아가 아니면 로마에, 마태복음과 야고보서는 소아시아가 아니면 팔레스타인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다서만은 소아시아에 있었다고 추정하기가 어렵다.
좀 더 정리해 보면 소아시아와 그리스를 합친 에게해 지역에 적어도 18본의 원본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많으면 24본까지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에는 2본에서 최고 7본까지, 그리고 팔레스타인에는 3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는 한 권도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에게해 지방이 단연 으뜸이고 알렉산드리아는 전무한 상태라는 것을 보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짐작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신약 성경이 처음의 전달 과정 기간 동안 최초의 원본에서 나온 가장 믿을만한 원문을 지니고 있었던 지역으로부터 보급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BB
댓글